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보두앵 4세|나병왕 보두앵 4세]](Baudouin le Lepreux) ==== *''' 보두앵 4세 ''' 보두앵은 어린 시절을 야파와 아스칼론을 거쳐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아버지와 궁전에서 보냈지만 그의 어머니,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 부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는 아모리 1세가 즉위하자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모종의 술수로 시돈의 영주가 되면서 이혼을 강요당하여 강제로 헤어졌다. 이후 계모이며 왕비인 마리아 콤니니 손에 자랐다. 보두앵은 9살이 되자 역사가이자 고위 사제이며 큰아버지 [[보두앵 3세]]의 친우인 [[기욤 드 티레]]가 가정 교사로 발탁되어 왕국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때 또래 아이들과 얼굴을 꼬집는 게임--중세 놀이 수준--에서 백전백승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행실을 보이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기욤 드 티레가 심각한 질병의 징조로 인식했지만, 나병으로 결론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사춘기 시절 점점 이상한 징조를 보이자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가 진찰한 결과, 보두앵은 심각한 피부병인 나병에 걸렸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부왕 아모리 1세에게 이를 보고했다. 모든 수를 써서 치료를 했지만 중세 의학 수준에서는 [[나병]]은 불치병[* 현대는 극심한 병세가 아니라면 리팜핀(리팜피신) 600mg을 1회만 복용하고 여러가지 항생제를 삼키면 완치가 되어 버린다.]이라 병세는 십대 후반에 급속도로 확산되어 몸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ldwinIV.jpg]]|| || [[보두앵 4세]][* 아이들 몸과 얼굴에 멍이 잔뜩 들어있고 [[보두앵 4세|보두앵]]이 상대편 아이의 볼을 잡고 심판인 듯한 아이가 손을 들고 있다.]의 나병 증상을 의심하는 [[기욤 드 티레]] || 보두앵의 아버지 [[아모리 1세]]는 [[1174년]] [[7월 11일]]에 급서했고 그 해 [[7월 15일]] 보두앵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며 보두앵 4세로 등극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매파와 비둘기파로 파벌이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와중에, 최대의 적인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를 기반으로 장기 사후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왕국을 포위하는 양상을 띄며 위협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너무 어렸던 왕을 대신하여 초기에 두 명의 섭정에 의해 지배되었다. 급작스러운 유고에 밀 드 플랑시(Miles de Plancy)가 비공식적으로 맡았고, 몇 달 뒤에 그가 사망하자 대의회에서 왕의 5촌 당숙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발탁되어 정식으로 왕의 앞에 위시했고 왕국을 대소사를 관장하기 위해 본거지를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 북쪽 근교의 티베리아스로 옮겼다. 문둥병자로서 보두앵 4세는 오랫동안 통치하거나 결혼하여 상속자를 낳을 가망성은 희박했고, 자연스럽게 보두앵 4세의 상속인이자 왕세매로써, 누이인 시빌라와 그들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라가 영향력을 가지는 위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시빌라는 베타니아의 수녀원에서 그녀의 대고모 할머니 이오베타(Ioveta) 수녀원장 슬하에서 자랐고, 이사벨라는 나블루스에서 그녀의 친어머니 여왕 마리아 콤니니 슬하에 있었다. 이렇듯 왕의 미래가 불투명하자 이래저래 왕국 사정은 [[막장]]이 되어 섭정들과 파벌들이 난립하여 여러 십자군 제후들이 2명의 자매에 대한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게 되는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왕이 병세와 비례하여 더욱 치열해졌다. 비둘기파의 좌장이었던 섭정 레몽 3세는 [[1175년]]에 왕국의 집정관(Connétables) 험프리 드 토론(Humphrey II de Toron)의 도움을 받아 살라흐 앗 딘과 일단 평화 조약부터 맺었다. 냉정하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의 누이 시빌라를 [[프랑스 왕국]]의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인 권력과 부를 지닌 북부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델 알레라미치(Guglielmo VII del Aleramici)와 정략 결혼을 시켰다. 굴리엘모는 자신의 혼인을 위해 [[1176년]] 10월 초에 레반트에 도착하여 바로 결혼했으며, 야파와 아스칼론의 공작이 되었다. 레몽 3세는 그가 시빌라와 더불어 보두앵 4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왕국을 통치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문둥이 왕이 다스리는 예루살렘의 왕국은 앞서 말한 대로 음모와 계략이 난무했다. 섭정인 티베리아스의 레몽 3세를 필두로 하는 파에는 티레의 대주교이자 역사가 기욤이 속해 있었으므로 레반트 프랑크인들에 대해 쓴 그의 역사서는 다분히 그들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기욤이 묘사하길 골 빈 모험가들과 어중이떠중이들, 그리고 권력에 눈이 멀었던 왕족 등 각양각색의 종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왕과 시빌라의 친어머니 아녜스 드 쿠르트네(Anes de Courtenay)였다. 역사서에서는 그 파벌이 복마전과 다를 바 없고 나라를 좀먹는 군상들의 집합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며 적고 있다.[* 역사 기록자 기욤 드 티레가 라틴 예루살렘 총대주교에 당선 직전 야지를 놓은 게 왕의 모후 아녜스라는 걸 감안하고 보자.] 아녜스는 항상 아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 파벌에는 안티오키아의 전 지배자 [[르노 드 샤티용]]도 있었는데 [[1176년]] 르노는 알레포의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그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황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의붓 아버지였기 때문에 마누일이 그의 몸값을 지불하였다. 동로마 황제의 보석금으로 17년이라는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풀려난 것이었다. 무슬림에 대한 깊고도 칠흑 같은 복수심을 가지고... 또 왕의 숙부요, 명목상 에데사의 백작이자 아크레의 영주 조슬랭 드 쿠르트네도 있었는데 조슬랭은 왕에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었지만 죽어가는 왕에게 왕위를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믿을 수 있는 보조자로 평가받았다. 이들이 보두앵 4세를 빈틈없이 꽉 쥐고 있었으므로, 1176년 여름 보두앵 4세가 15세로 성인이 되니 2년만에 섭정의 명분이 끝나버렸고 순식간에 이들이 권력을 휘어잡았다. 소년 왕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 보두앵 4세는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에 걸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세력 기반을 반 토막 내기 위한 공격을 스스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시리아의 장기 왕조가 아이유브 왕조에 의하여 몰락하면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 시리아의 통치자로 예루살렘 왕국을 쌈싸 먹는 형국이 벌어져 넘사벽의 적수로 부상하리라고 예상했기에 살라흐 앗 딘의 평화 협정을 유지하는 것은 왕 본인의 관 짜놓고 기다리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는 매파였던 아녜스파의 도움에 힘입어 레몽 3세가 살라흐 앗 딘과 맺은 평화 조약을 파기하여 다마스쿠스 지역의 안두자르(Andujar), 베카 계곡의 주변을 급습하였다. 강력한 견제 공격을 통해 보두앵 4세는 살라흐 앗 딘의 장기 왕조로 향한 알레포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한편 전성기 동로마 제국의 고토 회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군세를 일으켜 이슬람 세계에 위협 요소가 되고 있던 [[마누일 1세]]는 [[1176년]] 미리오케팔론에서 이슬람 세력에게 오지게 털린다. 이를 만회할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슬람의 구심점인 살라흐 앗 딘의 예봉을 꺾은 다음 보두앵 4세가 접선을 해왔다. 그는 [[마누일 1세]]에게 이집트 정벌을 위한 동로마 제국의 합동 공격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제국 황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계부로 표면상으로는 황제의 장인이었던 [[르노 드 샤티용]]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황제는 예루살렘 동방 총대주교의 부활과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향력을 발휘할 목적으로 자신의 조카 딸이자 마리아 황태후의 자매인 테오도라 콤니니와 안티오키아의 공국의 공작 보에몽 3세의 중매 결혼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줄 거 다 주고 제국의 약속을 이끌어 내어 일단은 성공적인 외교전을 펼치고 돌아온 르노는 때마침 아내 콩스탕스와 사별하여 부유한 미망인 스테파니 드 밀리(Stéphanie de Mily)[* 울트레주르뎅 공작 필립 드 밀리(Philippe de Milly)의 딸. 보두앵 4세의 첫번째 섭정 밀 드 플랑시의 부인이었다. 그전에는 험프리 드 토롱의 아내. 르노 드 샤티용이 3번째 남편]와의 결혼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그렇게 재혼을 하면서 울트레주르뎅 공작 부군과 헤브론의 백작 부군이 되었다. 이 결혼으로 그는 선왕 [[풀크]]가 사해 근처에 증축한 케락 성채를 손에 넣었다. 보두앵 4세는 르노와 야파와 아스칼론 공작인 매제 굴리엘모에게 왕국 남쪽의 방위와 이집트 정벌을 위한 협력을 보장받았다. 그런데 굴리엘모가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그해 6월에 아스칼론에서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그 사이 시빌라는 아들을 임신했고 8월에 태어난 아이는 [[보두앵 5세|보두앵]]이라고 명명되었다. 첫 번째 섭정 레몽 3세의 왕국 미래에 대한 백년대계이자 건실한 설계였던 동로마를 대신하여 유럽에서 받을 지원의 인적 관계가 그렇게 흐지부지 되었다. 비슷한 시점인 [[8월 2일]]에는 보두앵 4세의 유럽 사촌 필리프 드 플랑드르(Philip I de Flanders)가 이집트 정벌에 대한 십자군 지원을 선언하며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함대 150척과 함께 아크레에 아주 은밀한 계획을 가지고(...) 도착했다. 필리프가 도착하자 왕은 굴리엘모를 잃은 상실감에 그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며 [[풀크]]의 외손자이자 십자군 초대 왕들의 가문과 같으니 대의회에서 섭정의 지위로서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필리프는 자신이 단지 순례자로서 왔다며 아양을 떨며 거절했다. 그러자 왕은 르노 드 샤티용을 그의 접대사로서 임명하고 왕국의 생활을 지원케 했다. 기욤 드 티레는 이 상황에 대하여 기록하길, 저 가증스러운 필리프가 섭정의 지위보다 오히려 국왕의 누이들인 시빌라와 이사벨라와의 결혼으로 왕국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이 있었다며, 그 이후로는 그의 음험한 계략을 의회에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다고 비난 어조로 쓰고 있다. 레몽 3세의 파벌이었던 그는 시빌라의 재혼이 너무 성급하고 빨리 결정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전 섭정이었던 레몽 3세 역시 시빌라의 새 남편으로 자신이 지지하고 있던 이벨린 가문이 간택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벨린 가문의 신랑감은 [[발리앙 디블랭]]의 형 보두앵 디블랭이었다. [* 킹덤 오브 헤븐 영화에서는 레몽 3세가 발리앙을 시빌라 남편감으로 밀지만 사실은 형 보두앵이었다.] 보두앵 디블랭이 공공연한 필리프의 요구를 사람들 앞에서 무례하다고 항의하며 모욕을 주고 예루살렘 대의회도 동의하자 마음이 상한 필리프는 예루살렘을 떠나 그 대신에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종군하여 하림(Harim) 공성전에 참여했지만 실패했고 프랑스로 귀환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제국과 왕국의 해묵은 알력 때문에 전대와 마찬가지로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고 두 동맹은 수륙 양면 작전을 포기한다. 그 후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동로마 동맹군의 협조를 받지 못한다. 이렇게 되자 주도권은 다시 살라흐 앗 딘에게 넘어가버렸다.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망조는 사실상 이 시점부터 시작이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으니 망조의 첫번째 징조인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이다. 그는 물론 아녜스파에 속했다. 기는 형제 아모리와 주군인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리인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푸아투(Poitou)의 영지에서 추방당했었다. 기는 명예도 재산도 몽땅 잃어버렸으나 잘생긴 얼굴과 호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시빌라가 그에게 반해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이후 왕국의 장래에 큰 변화가 다가오게 된다. [[1177년]] 11월 왕의 나이가 16살인 시점에 살라흐 앗 딘은 동로마의 선단이 철수하자 수비군이 적은 예루살렘 왕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아스칼론 요새를 노려 이집트 방면에서 2만 6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려 하였다. 적의 군세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발하여 북상하자 보두앵은 이 정보를 입수하고 가까운 케락의 르노 드 샤티용을 호출하는 동시에 직접 누이 시빌라가 있는 아스칼론을 도우려 토론의 험프리 2세, 발리앙 이벨린과 약 580명의 [[성전 기사단]]을 이끌고 살라흐 앗 딘보다 먼저 요새에 도착하였으나 곧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포위당할 위기에 처해졌다. 이때 보두앵은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예수가 못박혀 매달렸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의 기도를 하였다. 어린 소년 티를 못 벗은 문둥병 왕이 성십자가를 향한 이질적이고도 성스러운 기도 모습이 펼쳐지자 그것을 본 험프리, 발리앙, 르노를 비롯한 모든 기사가 고무되어 끝까지 항전할 것을 맹세했다. 성십자가의 버프를 받아 무슬림 대군 앞에서 [[분기탱천]] 된 보두앵 4세의 군대는 전투를 개시했는데, 2만 6천명의 살라흐 앗 딘 군에 겨우 400명에 불과한 기사들을 이끌고 한 덩이가 되어 돌격을 했다. 비록 숫자가 턱없이 적다고 해도 그 당시 중무장한 기사들이 뭉쳐 일시에 돌격하는 파괴력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했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을 한 살라흐 앗 딘 군은 어린 왕과 그의 기사들에게 순식간에 돌파 당했다. 살라흐 앗 딘의 쿠르드족 친위대들까지 와해되고 자신의 전투 막사까지 이벨린의 발리앙(!)을 비롯한 십자군 기마병들이 들이닥쳐 스스로 칼까지 뽑을 정도로 자신의 안위까지 위험할 지경에 이르자 살라흐 앗 딘은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훗날 몽기사르의 전투로 역사에 기록된다. 왕은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였다. 이처럼 나병이 자신의 몸을 덮쳐 죽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왕국을 방호했다. 같은 해, 보두앵은 자신의 의붓 어머니인 왕태후 마리아 콤니니를 살라흐 앗 딘을 죽일 뻔한 성과를 올린 [[이벨린의 발리앙]]과의 혼인을 승낙하였다. 이는 이벨린 가문이 왕국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마리아가 지지함에 따라 이벨린 가문의 보두앵 디블랭과 시빌라, 이사벨라 공주와의 혼담도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아쉽게도 시빌라는 기만 쳐다보고 있었음을 제후들은 몰랐겠지만(...) 살라흐 앗 딘과의 전황은 승리와 패배가 번갈아 이어졌다. 왕국은 무슬림의 공세에 맞서 요충지들을 방어해 내지만 지속적인 손실을 입었다. 이집트 함대는 동로마 함대의 견제가 없어지자 아크레 항까지 침투하기도 했다. 한편 왕국의 북쪽에서 무슬림 경기병들이 안티오키아 공국령인 [[비니아스]](Banias) 지역으로 가축 약탈을 목적과 지역 황폐화를 목적으로 같은 동족인 아랍인들의 농경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농민과 시민이 피폐해지자 빈궁이 가속화되었고 왕국에게 세금과 지대를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이 그치지 않으면 살라흐 앗 딘의 파괴 정책에 의해 십자군 왕국은 약체화는 덤으로 따라오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왕국군은 갈릴레아 호수 근처의 티베리아스로 이동했다. 거기에서 그는 북서쪽 제파트 요새로 진군했다. 이 방면으로 이동을 계속하며 군세를 불리며 테에로스의 토론 성에 도착하여 역전 노장 험프리 드 토론(Humphrey II de Toron)이 파티에 조인했다. 국왕은 성전 기사단의 8대 단장 오도 드 생타망(Odo de St Amand)이 이끄는 성전 기사단과 레몽 3세의 트리폴리 백국 군대와 함께 북진했다. 해안 동쪽에서 십자군은 멀리 있는 무슬림의 진영을 목도했다. 왕과 그의 귀족들은 즉시 서쪽 평지로 내려가며 공격했다. 십자군 군대가 언덕 아래로 이동했기 때문에 기마 부대의 충격 전술은 배가되었고 즉시 무슬림 보병을 끔살시켰다. 몇 시간 지나자 사란센군의 약탈 본대가 귀환하러 오자 조우하고 쉽게 그것을 격파했다. 그렇게 대승으로 전투가 끝난 건지 착각했던 왕국군은 방심하기 시작했다. 살라흐 앗 딘의 첩보원들은 십자군들이 반격하러 시리아를 노리고 공세를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살라흐 앗 딘은 휘하 장군인 조카 파루크 샤(Farrukh-Shah)에게 몰래 천 명의 기동대를 병력을 주어 다마스쿠스 인근 국경선을 강화하고 적의 공격을 사전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던 십자군은 그들 나름대로 여기에는 상대의 병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예상하지 않았는지 레몽 3세와 오도는 마루쥬 아윤이라는 리타니 강 사이의 넓은 땅으로 향했다. 십자군은 그날 일찍 진군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했고 무슬림 군대는 골란 고원의 동쪽에서 접근하여 무방비 상태인 그들에게 습격 준비를 했다. [[1179년]] [[4월 10일]] 보두앵 4세는 살라흐 앗 딘의 조카가 이끄는 별동대가 갑툭튀하여 이 전투에서 보두앵 4세는 너무 앞쪽으로 나와 적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곧 적의 병력에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왕은 문무를 겸비한 기사이기도 했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단기적인 전투에 임해서는 앞뒤 안 보고 혼자 돌격한 적이 많아서 항상 주변의 호위 기사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 때 왕을 구한 것은 바로 선왕 보두앵 3세와 아모리 1세 시절부터 왕국의 충신이었던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였다. 왕의 호위 기사이자 왕국의 존경받는 공직자 험프리 드 토론이 칼을 다 맞아가며 간신히 혈로를 뚫고 전장을 이탈했다. 십자군 생존자의 대부분은 전장에서 남서쪽의 보포르 성으로 퇴각하여 적의 추격을 따돌렸다. 험프리는 보두앵 4세를 구했지만 그 자신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결국 곧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였다. 사실 이 전투의 가장 큰 손실은 바로 험프리 2세 같은 중요한 인물을 잃은 것이었다. 험프리 2세는 기사도에 충실한 보기 드문 십자군 기사 겸 영주로 과거 어렸었던 선왕 보두앵 3세가 자신을 왕국의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도록 보좌했었다. 이후 보두앵 3세의 가장 믿을 만한 신하가 된 그는 보두앵 3세가 죽고 난 이후에는 과거 반대 진영에서 대립하기도 했던 [[아모리 1세]]를 도와 4차례에 거친 이집트 원정을 도왔던 노장이었다. 그 이집트 원정에서 살라흐 앗 딘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던 험프리 2세는 살라흐 앗 딘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1175년]]의 휴전 협정을 맺기도 했던 것이다. 아모리 1세가 사망한 이후에는 다시 어린 보두앵 4세를 보좌했을 뿐 아니라 몽기사르 전투 등 주요 전투에도 참전했던 경험 많고 현명한 충신이었다. 그런데 [[1179년]] 이처럼 뜻하지 않게 보두앵 4세가 위험에 빠지자 자신을 희생해서 국왕과 국왕이 없으면 다시 왕국이 혼란에 빠질 뻔한 예루살렘 왕국을 살린 것이다. 당시 아랍의 역사가인 이븐 알 아티르가 토론의 험프리 2세에 대해서 "어떤 말로도 그를 묘사할 수가 없다. 그의 이름은 용맹과 전술의 대명사였다. 그는 진정 신께서 무슬림을 벌 주기 위해 퍼트린 역병이었다" 라고 칭찬인지 비난인지모를 모호한 찬사를 했던 만큼 험프리 2세의 부재는 예루살렘 왕국에 너무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제 선왕 시절부터 믿을 만한 왕국의 충신들은 레몽 3세 정도만이 남아있지만 그는 자신의 영지를 지켜야 했고 섭정 자리에서도 물러났으므로 예루살렘에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힘들었다. 왕실이 복잡다단해지는 시점에서 보두앵 4세는 순교자가 된 기사들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벼르다가 [[6월 10일]] 사라센 군세가 [[시돈]]으로 들이닥치자 곧바로 티베리아스의 레몽 3세와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을 통솔하여 살라흐 앗 딘이 기다리는 시리아로 깊숙이 진격했는데, 전투 중 낙마하고 만다. 당시에 이미 지병인 나병이 심해진 탓에 스스로 일어날 수조차 없었으나 병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보두앵 4세와 레몽 3세를 제외한 예루살렘 왕국과 기사단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살라흐 앗 딘의 포로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1180년]] 예루살렘 왕국과 아이유브 제국의 휴전 협정과 동시에 석방되었지만 성전 기사단장 오도 드 생타망은 두 번 내리 포로가 되자 다마스쿠스의 감옥에서 남을 것을 고집하여 그 곳에서 숨을 거둔다. 살라흐 앗 딘은 이렇게 한차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회교도 세계에서 입지를 더더욱 굳히게 된다. 그는 여세를 몰아 장기 왕조 사람들을 반역죄로 고발했지만 알레포와 모술 주민들의 지지 덕분에 명맥을 유지한다. 이 외부 상황과는 다르게 예루살렘 내부에서는 전대의 맹목적으로 충성을 받치던 기사들이 죽어 나가자 반대 급부로 살판 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국왕의 친 모후인 아녜스였다. 아녜스는 자신을 왕비에서 내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왕국을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려고 했다. 점점 나병으로 인해 고통이 심해가는 보두앵 4세는 잦은 전투로 인해 측근들이 전사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견제하는 세력이 없어져 단독으로 외척들에게 권력이 누수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을 만난 활어 마냥 활개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무슬림에 대하여 깊은 증오심을 가진 르노 드 샤티용이었다. 그는 대 무슬림 강경파인 성전 기사단과 손을 잡고 부유한 무슬림 캐러밴을 약탈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르노는 아녜스의 파벌에 동조하고 있었으니 왕국의 사정은 나날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험프리도 전사하고, 레몽 3세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예루살렘의 왕궁은 이들 차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시빌라가 보두앵 4세에게 기와의 결혼을 반 협박으로 허락 받기에 이른다. 무슬림과의 전쟁으로 내부적인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레몽 3세와 발리앙 디블랭 그리고 신랑감에 근접했던 보두앵 디블랭은 멘붕에 빠졌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기는 왕의 매제이자 왕위 계승자의 후견인으로서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일약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또한 왕실 가족의 체면치레를 위하여 야파의 백작이 되었고 시빌라가 죽은 첫번째 남편 굴리엘모의 상속자로 야파와 아스칼론의 공작이었으므로 기는 남편으로써 공작 부군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그러자 르노 드 샤티용은 법적으로 지역을 통치하는 공작이 아닌 같은 공작 부군이라는 들러리 직책에 동질감을 느꼈는지 급부상한 기와 함께 다니며 일을 크게 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왕국 남부라는 지역적 이점으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도로를 통제하기가 용이했다. 살라흐 앗 딘에게는 아주 중요한 노정인 이집트를 경유하여 다마스쿠스에서 메카로 가는 길목을 막기에 이른다. 그렇게 되자 기어이 협정을 무시하고 약탈을 일삼고 호적적이고 광신적인 행태로 황당하고도 경솔한 국지전이 빈번히 일어났다. [[1181년]] 르노와 그 일당들은 휴전 협정을 폐기를 선언 하지도 않고 대대적으로 메디나에 인접한 타이마의 오아시스를 향하여 독단적으로 진군한다. 하지만 한번의 견제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그는 도중에 부유한 대상들의 거점을 약탈, 금괴 20만 개를 빼앗는다. 보두앵 4세는 이 사실을 알고 즉시 반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살라흐 앗 딘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 지역을 습격하여 파괴 공작을 명령하는 한편, 본대는 울트레주르뎅 부근에 체류하게 했다. 또한 하마를 점령하고 다마스쿠스를 위협하여 병합한 것을 근거로 장기 왕조가 십자군 이교도들과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그 명분으로 치열한 공격 끝에 알레포를 점령한다. 마침내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강역은 예멘과 튀니지의 동쪽 국경에까지 이르렀고 가히 아이유브 제국의 탄생이었다. [[1183년]]에는 문둥병으로 인해 왕의 시력이 떨어지자 대의회에서 섭정을 세우는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왕의 매제인 기가 섭정으로 지명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은 알레포와 모술 지역의 장기 왕조의 잔당을 공략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아이유브 왕조의 공격 선상에서 벗어났고 6년 간의 평화가 도래한다. 르노의 통제 불능 국지전의 행태는 간간히 일어났지만 살라흐 앗 딘은 보두앵 4세와 화해를 계속했기에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는 르노였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이 후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존속을 위해 무슬림을 최대한 포용하고 살라흐 앗 딘과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우발 사태가 벌어지면 말 안장 위에 몸을 묶어서라도 전장에 나서 지속적으로 살라흐 앗 딘과 분쟁을 치르면서도 적들과 우군들에게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믿을 수 없이 대단히 개혁적인 성향도 있어서 허례허식을 없애거나 이유 없는 탄압과 폭정은 일절 하지 않았고 예루살렘 왕국 내부의 아랍인들에게도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상황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제후들의 다툼과 계속되는 군사 원정으로 인해 나병이 점점 악화되었다. 이런 혼란기 속에서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완전히 평정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점차 압박했다. 1185년이 되자 보두앵 4세의 힘겨운 투쟁도 거의 막바지에 가까워졌다. 이미 망막까지 병균이 침투해 장님이 되어버린 국왕의 유언이 궁정 회의에서 발표되었다. 내용인즉 첫째, 시빌라의 장남 보두앵 드 알레라미치가 다음 가시 면류관의 주인이다. 둘째, 절대로 기 드 뤼지냥은 섭정이 될 수 없다. 셋째, 그 영예는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3세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레몽 3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 의지할 곳 없는 소년은 늘 건강이 허약하여 골골거렸는데 만일 죽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의심이 후견인에게 쏠릴 테니 레몽은 이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신 명목상 에데사 백국의 백작인 조슬랭 드 쿠르트네, 조슬랭 3세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다. 그 공개 유언은 아주 시기 적절했다. 그 사이 예루살렘에서 저 용감한 왕 보두앵 4세가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영원한 안식을 위해 하늘로 불려갔기 때문이다. 보두앵 4세의 통치는 그것이 그의 개인적인 탓은 아니지만서도, 과정은 찬란했지만 결과적으로 레반트 기독교 국가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는 왕국의 대의를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지만 그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왕국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만 앞세우려 하던 강력한 파벌들을 통제할 힘을 갖추지 못했다. 왕국은 과거 [[멜리장드]]와 [[보두앵 3세]]의 모자 갈등으로 인한 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토록 분열된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야 우트르메르에는 경쟁을 일삼는 파벌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던 강력하고 부계로 내려오는 정통성 있는 통치자가 늘 있었지만 이제는 그 정치력이 사라졌다. 이에 반해, 수니파 무슬림들은 통찰력과 인내력과 지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원을 갖춘 [[살라흐 앗 딘|한 사람]]을 중심으로 지하드의 깃발 아래 통합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